AI 네이티브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몇주가 지났습니다.
선언은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이제 AI와 함께 처음부터 생각하겠다"고 다짐하는 것까지는요. 그런데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하면, 선언과 현실 사이에 생각보다 큰 간격이 있다는 걸 금방 알게 됩니다.
Sprint 7이 첫 주에 만든 건 5가지 프로덕트였습니다. 멤버들이 각자 아이디어를 잡고, 직접 설계하고, 실제로 작동하는 것을 만들어왔습니다. 그 결과물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서,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타겟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만드는 사람이 프로덕트 안에 있다
어떤 멤버는 음악을 듣다 문득 영화 장면이 떠오르는 경험에서 시작했습니다. 특정 OST를 들을 때 떠오르는 영화가 있고, 그 감각을 역으로 추적해서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를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Movie Curator가 시작됐습니다.
500개가 넘는 OST와 영화 페어링을 직접 정리하다가 무료 데이터베이스 한도에 걸렸을 때, 이 멤버가 택한 건 우회가 아니었습니다.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더 큰 외부 DB를 어떻게 붙이지?"에서 "내가 쌓은 페어링을 학습 데이터로 쓸 수는 없을까?"로. 막힌 지점에서 진짜 차별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본 것입니다.
"내 무드를 학습하는 게 이 프로덕트의 핵심 차별점이라는 걸 만들면서 알게 됐어요."
처음 설계할 때 알았던 게 아닙니다. 만드는 과정에서 비로소 선명해진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멤버는 계획 없이 시작했다가 결과가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주식 시장 여론을 분석하는 프로덕트(Day Trader Scanner)를 만들던 중, API 비용 문제가 생기고 데이터 소스가 흔들리고 결과가 맞지 않았습니다. 그 경험이 이 멤버의 작업 방식을 통째로 바꿨습니다.
이후엔 반드시 Research 문서를 먼저 쓰고, Plan 문서를 작성하고, 그 다음에야 만들기 시작하는 순서를 지키게 됐다고 합니다. 그 방식으로 학교 프로젝트에 도전했더니 1주말 만에 한 학기 분량을 끝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진을 찍는 멤버는 두 가지를 만들었습니다. 촬영 위치와 시간을 기록하는 Shot List Maker, 그리고 스마트폰 위치를 자동으로 남기는 Film Camera Log. 발표 내용은 무척 구체적이었습니다.
"나의 루트가 차별점이에요."
자기가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방식이 프로덕트의 설계 안에 녹아있다는 것. 처음부터 6개국어 지원을 고려한 것도, 여행지에서 쓸 수 있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드는 사람의 삶이 프로덕트의 범위를 결정했습니다.
이름을 생성하는 프로덕트를 작업하던 멤버는 한국 출장으로 3주가 정체됐다가 돌아왔더니 결과의 한계가 보였습니다. AI API에 그대로 맡겨 이름을 생성하니 결과가 너무 비슷비슷하다는 것. 페인포인트가 보이고 나니 선택지는 둘이었습니다. API 호출을 더 정교하게 다듬어서 매번 다른 결과를 끌어내는 길, 아니면 문학과 영화·강아지 이름·브랜드명·도메인 핸들 같은 큐레이션 데이터를 직접 모아 매칭에 쓰는 길.
API 호출 쪽은 빠르지만 매번 비용이 들고 결과가 흔들립니다. 큐레이션 쪽은 손이 많이 가지만 자기만의 라이브러리가 됩니다.
"정체가 헛된 시간은 아니었어요. 돌아와서 뭐가 부족한지 더 잘 보였거든요."
아직 결론은 내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멈춰있는 동안 질문이 선명해진 건 분명했습니다. "이름을 더 잘 뽑는다"에서 "어떤 결을 가진 이름이 모인 라이브러리를 만든다"로.
자기 Pain point가 출발점이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감정 상태를 입력하면 작은 행동을 추천해주는 앱(Thinker)을 만든 멤버의 첫 마디가 이랬습니다.
"생각만 많고 실행을 못하는 사람이라서요."
그 말이 그대로 프로덕트가 됐습니다. INFP 성향인 자신을 위해 만들었고, "할 일"이라는 단어를 아예 쓰지 않기로 설계했습니다. 시작하는 것 자체를 성공으로 카운트하도록요. 만들면서 처음으로 이미지 툴을 써봤고, CSS 애니메이션이 필요했는데 AI가 그걸 직접 구현해줬습니다. 지금까지 디자이너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것이 이미 자기 손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멀리 갈 수 있을지 모른다
5가지 프로덕트를 하나씩 들여다보면, 설계 안에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지, 어떤 생각 패턴을 가진 사람인지. 그것이 프로덕트의 특징이 됐습니다.
이전이라면 "이게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가?"를 먼저 물었을 것입니다. 수요를 먼저 증명하고, 그 다음에 만들었겠죠. 그게 상식적인 순서였으니까요.
그런데 AI와 함께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 질문의 순서가 달라졌습니다. 먼저 내가 진짜 필요한 것을 만들고, 그것이 나만의 것인지 아닌지는 그 다음에 봅니다.
이 흐름에는 우리 사이에서 오간 한 가지 관찰이 있습니다. 비슷한 SaaS는 점점 AI 한 번에 대체되고, 앱스토어에서도 같은 카테고리에 비슷한 앱들이 빠르게 묻혀버립니다. 그렇다면 남는 길은 오히려 더 좁고 더 그 사람만의 것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가설이 있었습니다.
사진 프로덕트를 처음부터 6개국어로 설계한 것, 이름 생성 프로덕트가 문학과 영화에서 이름을 가져오려 하는 것, 감정 기반 앱에서 "할 일"이라는 단어를 지운 것. 처음엔 매우 개인적인 결정처럼 보이는데, 어쩌면 그 정도로 좁고 구체적이어야 의미가 있는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루트가 차별점이다"라는 말은 그냥 기능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니즈가 정말 더 멀리 가닿는 길인지, 아니면 첫 사용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안전한 출발점일 뿐인지는 아직 확인된 게 없습니다.
그래도 그쪽으로 한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AI 네이티브가 된다는 건, 더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을 만들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더 정확하게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언 이후 일주일
지난 주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AI를 마지막에 부르는 습관에서, 처음부터 같이 설계하는 습관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고 싶다고.
그 변화가 어디서 오는지 조금 보입니다. 기능을 어떻게 구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더 정확하게 아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면서,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계획 없이 시작했다가 설계부터 다시 한 멤버, 3주 정체 끝에 다음 버전이 선명해진 멤버, 만들면서 비로소 핵심 차별점을 발견한 멤버. 과정이 달랐지만, 만들고 나서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는 점은 비슷했습니다.
아직 확신은 없습니다. 일주일이 전부이고, 앞으로 몇 주가 더 있습니다.
Sprint 7은 만들면서 자기 자신을 더 정확하게 보는 공개 학습 기록입니다.
아직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들면서 봅니다.
아직 충분히 나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들여다봅니다.
아직 AI 네이티브는 아닙니다. 그래서 계속 만들어봅니다.
Sprint 7
매주 월요일, 5분 분량의 뉴스레터로 이번 주 배운 것을 정리합니다.
모든 채널은 https://sprint7.dev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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